유관순은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유관순의 생애와 업적은 한국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한 투쟁의 상징입니다.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나 1920년 11월 17일에 사망했으며,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며, 고집이 세고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담대한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했으며,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아우내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1. 유관순의 업적
-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됨
- 1919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함
-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 만세운동을 벌임
-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함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습니다. 전시물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제에 체포될 당시 옆구리의 상처와 계속된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해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재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으나 1930년대 중반 일제의 도시개발로 묘지가 이전되는 과정에서 망실되었습니다.
현재는 서울 망우리 역사문화공원 내 무연분묘에 합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서대문형무소와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했습니다.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이했던 날, 함께 수감 중이던 감방 동지들에게 "밖에서는 조용하지만 우리도 조용히 있으면 죽은 줄로 알 것이니 만세를 부르자"며 옥중 만세를 주동하여 형무소 밖 군중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외쳤고, 일제에겐 절대 굴하지 않는 꿋꿋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는 유관순 열사에 모진 고문을 가했고, 결국 유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불과 18살의 어린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이에 일제는 유관순 열사에게 더욱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구체적인 고문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벽관고문: 벽에 몸을 고정시키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고문입니다.
2. 물고문: 물고문은 물에 얼굴을 잠그는 고문입니다.
3. 태형: 태형은 매를 가지고 때리는 고문입니다.
이외에도 성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성고문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문으로 인해 유관순 열사는 심각한 부상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한 유관순은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 각 3년형, 김용이, 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상훈, 백정운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 박제석 각 8개월 형, 박봉래 기각, 신 씨 무죄,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각 2년형, 김상철 6개월 형 등의 판결을 언도받았습니다.
이후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한 끝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으나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으며,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 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3. 유관순 열사의 순국 이후
유관순 열사는 순국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일제가 군용기지르 조성하는 과정에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실전된 상태이며, 2015년 9월에 세워진 추모비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을 받았으며, 1972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위치한 그녀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1년 12월에는 생가가 전소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습니다. 현재는 작은 초가집 형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유적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12019년 2월 26일에는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서훈하였으며, 매년 2월 28일에는 3.1절 경축 전야제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4. 3.1운동의 의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한국 역사에서 빛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이 민족적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발하여 수백만 명의 국민이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 나와 독립을 외치며, 일제의 억압에 대항했습니다.
3.1운동은 '3.1 독립선언', '3.1혁명', '3.1 독립만세운동', '기미 독립운동' 등으로 칭하기도 합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식민 통치 방식에 변화를 꾀합니다. 기존의 탄압 중심의 통치 방식에서 교활한 문화 통치로 바꾸는데, 이는 표면적으로 문화적인 듯 보이나 실제로는 한민족을 분열시키고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런 정책의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보다 강압적인 통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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